프로야구판과 상업영화판 by 아우라

그전부터 야구는 있었지만 상업이 가미된 프로야구로만 한정하자면 1982년 이후로 어느덧 만 30년이 지났습니다. 현재 공식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한국 최초의 영화는 1919년 김도산이 만든 <의리적 구토(義理的 仇討)>이니 한국의 영화역사는 어느덧 100년에 다가서고 있지요. (지난한 과거는 애써 모른 척 해보자면,) 문득 최근의 프로야구판과 상업영화판을 팬과 생업종사자로 관계 맺고 지켜보면서 이 둘이 꽤나 닮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프런트 위주의 구단운영으로 전환되면서 야구감독들은 눈치를 보며 파리 목숨을 연명하는, 이제는 하나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 것이 대형투자배급사에게 목줄이 잡혀 찍는 기계로 전락해가는 상업영화 감독과 닮았고, 그러다보니 각 구단 특유의 야구 스타일이 점점 사라져 가는 것이 공식에 맞춘 교집합 속에서 색깔을 잃어버린 각각의 제작사들과 닮았고, 그간의 기여도나 팬심을 외면하면서까지 나이든 노장 선수들을 냉정하게 그라운드에서 쫓아내는 것이 영화판 노장 감독 및 스텝들을 감각이 떨어졌다는 핑계를 들어 골방으로 밀어내는 것이 그렇습니다. 그 외 찾아보면 더 있을 것입니다. 엘리트들 위주의 야구와 영화, 지층기반이 되는 아마추어들의 비정상적인 시스템 등. 개인적으로는 프로야구팬이 된 계기와 비전공자이면서도 영화를 생업으로 삼게 된 계기가 꼭 닮았습니다. 중간에 몇 년 소원하긴 했지만 원년부터 타이거즈를 응원했고, 15년째 영화로 밥벌이 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좋지 않은 것만 떠오르니 이래도 되나 싶네요. 마음이 바깥 날씨입니다.

엄마와 계란국 by 아우라

미리 이야기하지만 이 글은 꽤 길어질 것이다. 울 엄마는 내가 기분 좋아 웃고 있을 때 돌아가셨다. 이 생각이 떠오른 건 새벽에 잠이 들어 점심때쯤 일어나 배가 고파 부엌을 갔는데 먹을 게 아무것도 없어서 이었을 수도 있고, 오늘처럼 비가 와서 일수도 있다. 일단은 라면이라도 끓일까, 시켜 먹을까, 아님 그냥 먹지말까 하는 고민을 잠시 하는 중에 창밖으로 빗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라고 해두자. 어린 아이의 눈으로 보아도 참 억척스럽게 사셨던 울 엄마. 양가의 반대로 쫓겨나다시피 초라한 결혼을 하셨고 (말씀으로는 집에서 냄비 하나 들고 나왔다고.) 제대로 된 양장 한 벌 없이 나중엔 장사까지 하시면서도 출장으로 자주 집을 비우시는 아버지 몫까지 더하며 사남매를 키우셨다. 그 어려운 살림에도 큰 아들만은 공부를 잘 해야 한다면서 당시 소도시에서 보기 힘들었던 개인 과외까지 시켜줬다. 나만. 물론 그 편애의 대가로 엄마 손에 쥐어진 회초리는 온전히 내가 다 감당할 몫이었다. 나만 맞았다.

사업이 번창하면서 아버지가 고향에서 젊은 유지 소리를 듣고 다니실 때도 엄마는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막내 동생을 등에 업고 힘든 장사를 하셨고, 자개가 붙은 장롱엔 양장 한 벌 걸리지 않았다. 사는 것은 그렇지 않으면 이상하듯이 이후 아버지 상황이 곤두박질함과 동시에 할아버지와의 사이가 극에 달해 도망치듯 서울로 이사 가는 것이 결정 되던 밤에는 나와 눈높이를 맞추고는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선명히 기억한다. “네 놈 교육 때문에 서울 가는 거다. 서울 아이들은 여기 아이들보다 똑똑하다. 가면 공부 열심히 해야 한다.” . 다 알고 있었지만 나는 모르는 척 고개만 주억거렸었다.

엄마는 당신의 큰아들인 나를 절대로 부엌에 들이지 않으셨다. 중학교 때 한번은 별 생각 없이 설거지를 했는데 남가좌동 이모 댁에 다녀오신 엄마는 되레 방 빗자루를 들고 이제는 당신보다 키가 한 뼘은 더 자랐고, 사타구니 근처가 거웃 거렸 큰아들을 향해 달려오실 정도였으니까. 당연히 남자가 그런 거 배우면 써먹게 된다.” 면서 요리나 밥 짓기도 못 배우게 하셨던 분이셨는데, 어느 날인가. (정말) 갑작스럽게 어느 날인가.

그러니까 고 3 신학기가 시작된 지 두어 주 지났을 때, 조용히 부엌에서 엄마가 나를 불렀다. 갔다. 가스렌즈 위의 작은 냄비에서는 물이 끓고 있었다. “우라야, 지금부터 엄마가 하는 거 잘 봐라.” 하시면서 끓는 물에 계란을 하나 깨고, 숟가락으로 황소가 우습게 그려진 빨간 봉지에서 황색가루를 퍼서 넣으셨다. 몇 번 휘휘 저은 뒤 이게 끝이다. 여기에 파나 양파가 있으면 조금 썰어 넣어도 된다. 간단하게 만들 수 있으니 혹시 나중에 엄마가 없더라도 굶지 말고 이 계란국을 끓여서 먹어라.”라고 하셨다. 키만 컸지 속은 덜 자란 나는 그저 조금 이상한 날로 생각하며 어쨌든 태어나서 처음으로 요리라는 것을 배웠다는 내용으로 그날 밤 일기장을 채웠다.(나는 군대 가기 전 대학 4학년 1학기 때까지 일기를 썼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여덟 날이 지날 때 까지는. 정확히 아홉 날 째 되는 날. 10시까지 붙잡아두는 학교 강제(?)학습을 마치고 다음날 고 3 첫 모의고사였던 관계로 독서실까지 들러 새벽 1시가 돼서 집에 돌아와 보니 아무도 없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아침에 엄마가 싸준 두 개의 빈 도시락을 꺼내놓고 맥없이 앉아있는데 아버지가 들어오셔서 엄마가 몸살이 걸리셔서 오늘 하루 더 병원에 계셔야 한다. 별일 아니니 걱정 말고 자라.” 하시고는 지갑을 꺼내 지폐를 집히는 대로 꺼내서 주셨다. 내일은 밥을 사먹어야 되겠다고. 지금 와서 고백하자면 굉장히 좋았다. 매일 먹던 엄마의 도시락이 질리기도 했고, 조미료 가득한 두 끼의 매점 밥을 사먹고도 많이 남을 정도로 큰돈이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다음날 조미료 가득한 두 끼의 매점 밥을 사먹지 못했다. 3교시 시험이 끝나고 아이들과 답을 맞춰보고 있는데 담임이 화난 얼굴로 찾아왔기 때문이다. (왜 그랬는지 그는 나에게 화를 내며 말했다.) 돌아가셨다고. 뇌에 악마가 쳐들어와서 엄마가 사라져 버렸다고. “조금 이상한 날로 부터 정확히 십일 째 되는 날. 그것도 하필, 아들놈이 모의고사 3교시 영어시험을 너무 잘 봐서 쾌재를 부르고 있었을 때.

이 때문일 것이다. 내가 단 한 번어머니라는 단어를 입에서 내 뱉어 볼 기회를 가지지 못한 것은. 그래서 이 나이 먹도록 엄마는 엄마다. 이 때문일 것이다. 영화나 드라마, 뉴스 기사에서 사고가 있기 전 고인이 죽음을 암시하는 말, , 행동들에 대한 묘사들을 믿게 된 것은. 영상에선 이미 클리쉐가 되었고, 뉴스에선 이젠 가십꺼리로 다룰 뿐이지만 사람에겐 무의식적으로 죽음을 준비하는 오감 이외의 알 수 없는 무엇이 있는 거구나 싶은 건. 그것이 비록 우연일지라도 말이다. 우리는 이것을 평소 안 하던 짓 하면 죽는다.”는 말로 웃음 섞어 말하곤 하지 않은가.

그간 애써왔던 작업을 끝냈다. 술을 많이 마셨고 해장을 핑계로 오늘 같이 부엌에 아무것도 없는 날, 계란국이라도 끓여 먹을 법도 한데 말 안 듣는 불효자답게 일부러라도 외면하게 된다. 다행인 것은 20년이 훨 지난 시간 덕분에 마치 영화 <철도원>을 보았을 때처럼 슬프지만 예전처럼 베갯잇을 적시거나 하진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도 보고는 싶다. 매질하던 엄마가.

P.S 밤이다. 모든 글이 용서되는 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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