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카테고리
이전블로그
포토로그
태그
영화감독
말솜씨
박정운
편견
육회집
집행자
영화
언론통제
중학교시절
송시현
프로야구
부산국제영화제
영화인
한국시리즈
V10
관행
교차상영
도둑
과거
890년대가요
자전거
신종플루
언론자유
청춘의기억
스크린쿼터
우승
기아타이거즈
락앤롤
버릇
송재호
최근 등록된 덧글
송시현, 박정운, ..
by 지나가다 at 12/04 첫번째 노래의 제목은.. by 다이몬 at 12/03 저도 순간 '박'이 누구.. by 땅콩 at 12/01 첫번째 노래는 모르.. by 닥슈나이더 at 11/30 그 시절, 얄팍한 용.. by 프랭키 at 11/30 흐음...관객수가 딱.. by 아우라 at 11/30 일찍 가셔야죠. 아님.. by 아우라 at 11/24 법과 제도로는 안되는.. by 아우라 at 11/24 어렵지. 꼭 극장 사.. by 아우라 at 11/24 나도 상업영화 하고 .. by 아우라 at 11/24 최근 등록된 트랙백
Best online phar..
by Buying soma onli.. 간편한 종목추출 by 주식프로그램 무통장입금자동화.. by ALTAM 캠페인: 블로그에 근.. by Through the Migoj.. bliss의 생각 by bliss' me2DAY 이글루 파인더
|
2009년 06월 15일
'이승만 동상' 기금 마련위해 성금액 할당
대학시절, 집회열고 데모한다고 경찰서에 연행된 적이 있다. 맞을 만큼 맞고, 소설 같은 조서를 쓰고, 말할 만큼 말하고, 몇 밤을 경찰서 보호소 생활을 하는데 당시 경찰신분 이셨던 고모부가 면회를 와서 깜짝 놀란 적이 있다. 더 놀란 것은 그분이 핏기 없는 나를 앞에 두고 하신 말씀이다. “너 때문에 내가 잘릴지도 모른다. 제발, 정신 차려라.” 정년퇴임을 몇 년 앞두고 계신 고모부는 그 며칠 후 내가 보호소를 나왔을 때 아버지와 함께 같이 오셔서 다시 한번 “정신 차리라”는 말과 함께 지금은 기억에도 없는 선물 상자 하나를 주고 가셨더랬다. 정말 눈물도 웃음도 나오지 않는 일이었다. 몇 촌인지 가늠조차 하기 힘든 친척관계로 피도 안섞인 조카 녀석 때문에 그 분은 인생을 걸고 공포에 몸을 움츠리셔야 했는가. 원래 연좌제는 개인이 아닌 공동체생활이 우선시되는 고대사회에서 비롯된 것이다. 부여의 옛 법에도 범죄로 사형을 받은 자나 살인자의 가족을 노비로 만든다는 조항이 있다고 하며 고구려에서도 반역자들의 처자를 노비로 만드는 등 연좌제의 뿌리는 꽤나 깊다.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연좌제는 1894년 갑오경장 당시 “범인 이외에 연좌시키는 법은 일절 시행하지 마라”(罪人自己外緣坐之律一切勿施事)는 형사책임 개별화의 원칙이 천명됨으로써 드디어 폐지되었었다. 전근대 사회에 접어들면서 연좌제는 가장 비합리적인 형벌이라는 인식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다 연좌제가 되살아난 것은 한국전쟁 속에서였다. 전쟁이 발발하기 이전 이승만은 전쟁만 일어나면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겠다며 북진 통일을 호언장담했었다. 그러나 막상 전쟁이 시작되자 이승만 정권의 요인들은 점심은 대전에서, 저녁은 부산에서 먹을 정도로 뺑소니를 쳤다. 대구까지 내려간 이승만은 “각하, 너무 많이 내려오셨습니다.”라는 참모들의 건의를 받고 다시 대전으로 올라갈 정도로 자신만의 안위를 챙겼다. 이승만 정권은 그러함에도 의정부를 탈환했으며 국군이 북진중이니 서울 시민은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라는 말을 되풀이 했었다. 그래놓고 도망치면서 그것도 그냥 간 것이 아니라 한강다리마저 끊어버리고 가게 된다. 일반 시민은 물론이고 부통령 이시영을 비롯하여 정부 요인들 중에서 이승만과 약간 거리가 있었던 사람들은 이승만을 정점으로 하는 권력 핵심부의 도주를 전혀 알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부통령 이시영은 한강다리가 폭파되기 이전에 간신히 기차 편으로 빠져나왔지만 한강다리를 폭파하는 과정에서 다리를 건너던 1,500여명의 무고한 피난민이 폭살 당했다. 이렇게 미처 도강을 하지 못한 국민들은 이승만에 의해 기만당하고 버림받고 살해당했다. 그리고 석달 뒤 이승만 정권은 서울로 ‘개선’했다. 인민군 치하에서 석달을 보낸 시민들에게 후안무치(厚顔無恥)한 이승만은 한마디의 위로와 사과의 말은 없었다. 그 대신에 서울 시민에게 돌아온 것은 적치하의 부역자를 가려서 엄단한다는 서슬 푸른 방침이었다. 1950년 10월의 서울에는 부역행위를 했을 잠재적인 가능성을 지닌 채 심사와 처벌을 기다려야 하는 잔류파와 기세등등하게 부역자의 엄단을 외치는 ‘애국적(?)’인 도강파로 나뉘어 있었다. 이런 현상은 인민군의 통치를 벗어난 다른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부역자로 처벌되었다. 그런데 진짜 부역을 한 사람들은 대부분 월북을 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부역자로 처벌받은 사람들은 실상 이승만 정부와 인민군 양쪽에 의해 부역을 강요당한 힘없는 사람들이었다. 문제는 정부가 이들 개인을 처벌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 친족들까지 신원조회를 통해 공직 취임, 해외여행, 사회활동 등에 제약을 가한 것이다. 아무런 법적근거도 없는 연좌제에 의해 부역행위 잠재자를 친척으로 둔 사람들은 모든 사회활동을 차단시켰다. 연좌제는 권력을 가진 자들이 힘없는 사람들에게 가한 비열한 테러행위이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다. 누가 연좌제를 되살려냈는가? 바로 다리 끊고 도망쳤다가 개선장군처럼 되돌아온 이승만 이었다. 그런데 그 인간의 동상을 세우겠다고? 이후 연좌제는 군사독재정권의 생명연장을 위한 공약들 중에서 단골메뉴로 등장하게 된다. 박정희는 1963년 대통령선거에서 연좌제 폐지를 공약으로 내걸었다. 1966년 5월 엄민영 내무장관은 연좌제는 이미 폐지되었다고 언명했다. 대통령 선거를 앞둔 1967년 1월 중앙정보부는 공화당의 건의를 받아들여 사상관계 연좌제 관련자 24만명 중 5만명을 1차로 해제하며 앞으로 연차적으로 연좌제를 폐지하겠다고 발표했다. 다시 대통령선거가 다가온 1971년 2월 백두진 국무총리는 연좌제가 이미 폐지되었다고 선언했으며, 3월에는 내무부가 신원조회에서 연좌제 폐지를 약속했다. 그러나 그것은 지켜지지 않았다. 숱한 폐지공약들이 있었다는 것은 그것이 폐지되지 않고 사회의 병폐로, 혹은 권력에 의해 이용되어 왔다는 것을 반증하기만 할뿐 사라지진 않았다. 자신의 잘못이 없음에도 동기나, 후임병이 잘못하면 연대책임이라는 이유로 단체기합과 같은 수위의 폭력을 당연히 받아야만 했던 군대생활. 지지난 대선 때 장인이 좌익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도마에 올랐던 노무현 전 대통령. 그 외 가족이나 친척 중에 월북자가 있다는 이유로 사람대접 받지 못하고 살아왔던 수많은 피해자들. 개념도 예의도 웃기지도 않는 위 링크 기사는 그냥 무시하기로 하자. 어쩌면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이승만은 박정희, 전두환 보다도 더 우리에게 있어서는 안 되었을 대통령이다. 그리고 농담이라도 “3족을 멸하자”는 말도 피해야 할 일이다. <한홍구의 역사이야기 대한민국 사 01편 참조>
| |||||